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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한기총이 뭐길래

김경호 "예언자들의 거짓종교 비판을 통해서 본 오늘의 기독교"(포럼, 2010.04.13)

제 2차 한기총 진단 포럼 "한기총과 한국교회"
일시: 2010년 4월 13일(화) 오후 7시
장소: 교회다움
주최: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


예언자들의 거짓종교 비판을 통해서 본 오늘의 기독교

김경호(들꽃향린교회 목사)

들어가는 말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적 인물로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신앙을 지켜나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신앙은 가나안 종교와 뒤섞여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인간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수준의 모형이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도록 거룩하게 선택된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꼭 종교인 만은 아니었다. 예언자 교육을 받았거나 직업적인 예언자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평범한 목자이거나 농사를 짓다가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정치, 사회는 물론 백성들의 생활이나 신앙의 맹점들을 비판하였다. 특히 당시 종교인들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의 잘못된 종교 행위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글에서는 예언자들이 당시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들을 살펴봄으로서 당시와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자신을 살피고 바른길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교회와 예언

한국교회는 좀처럼 구약을 본문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예언서는 아주 소외되는 본문이다. 필자가 학생이던 때는 유신체제가 절정이었다. 그 때는 각 학교에 구약 교수, 특히 예언서를 전공한 분이 매우 드물었다. 예언서 자체가 워낙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성경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유신이라는 강압체제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유신이란 터무니없는 상황이 학문마저 제대로 가르칠 만한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는 터라 양심껏 가르치면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수들은 감옥으로 붙들려가거나 해외로 피신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비뚤어진 역사는 그것을 바로 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민주화되고 강단의 가르침이나 설교로 시비 거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도 알아서 하는 것이 체질이 되었는지 구약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언서는 한국강단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다. 필자도 같은 목회자 입장에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예언서의 내용이 심판, 경고, 징벌의 메시지이니 참 듣기 껄끄럽고 이것으로 설교하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복 받는다, 잘 된다’ 하는 소리는 얼마든지 좋으나 ‘망한다, 심판받는다.’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예언서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 부분인데 아주 무시하는 것은 한국교회 강단이 너무 대중의 눈치만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예언서를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선포의 기능은 사라지고 점점 예언자가 그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참혹한 모습을 빼어 닮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아모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나실 사람에게 포도주를 먹이고 예언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암 2:12).

한국교회는 예언서를 버리고, 듣기 거북한 메시지는 걸러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만을 요구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도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게 되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에도 “이 하나님은 자기들의 입맛대로 주문 생산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단지 만들어낸 우상일 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복종해야한다. 그분의 껄끄러운 메시지 앞에 부서져야 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를 잘라내기는커녕 아예 하나님을 “더 채워 달라”, “더 부어 달라”는 자신들의 욕심이나 채워주는 대상으로 삼는다. 그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욕심을 투영해 빚어낸 우상이지 결코 참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소리쳐 기도하더라도 만약 자기들의 욕구대로 주문하고 그에 부응하도록 주조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라면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아모스 : 야훼의 날

이스라엘이 바라던 야훼의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는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그들에게 현재 번영은 하나님 은혜의 표시였다. 그 당시 왕, 제사장, 예언자, 민중은 모두 입을 모아 “야훼의 날”을 기다렸다. 그날은 가까운 장래에 있을 민족적인 승리의 날이었다. 그들에게 ‘지금’은 ‘그날’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올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흠모하는 시간이었다. 지도층은 그런 앞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민중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지배자들이 제시하는 장밋빛 청사진과 같이 부의 총량은 늘어났으나 민중의 삶은 처참했다. 부가 늘어나면 모두가 잘 살게 된다는 논리는 허구였다. 물질은 풍요했고 부는 넘쳐났다. 그러나 부는 소수에게 집중하였고 오히려 가진 자들은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그들이 벌이는 술수와 억압은 점점 더 교묘하고 악질적이어서 상상을 초월하였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물질은 독과 같은 것이었다. 아모스 예언의 두드러진 점은 그들이 바라던 장밋빛 미래, 야훼의 날이 오히려 무서운 심판의 날이라는 것이다.

나 주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징벌하는 날, 베델의 제단들도 징벌하겠다. 그 때에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다(암 3:14).

너희는 망한다! 주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사자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곰을 만나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 주님의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캄캄해서, 한 줄기 불빛도 없다(암 5:18-20).

종교지도자들의 하나님은 풍요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하나님이고 오늘의 고통을 참으면 내일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이었다. 이들은 자판기 같이 복과 물질을 내어 놓는 하나님을 외쳤다. 이에 대해 아모스는 그날은 축복의 날이 아니고 심판의 날이라고 외친다. 야훼 하나님은 탐욕에 대해 분노하는 신이다.

아모스의 혹독한 심판선언과 정의에 대한 외침은 중앙 베델의 제사장 아마샤에 의해 고발당하고 마침내 아모스는 추방당한다. 아모스는 “반란을 꾀하는 자, 나라를 망치려는 자”(암 7:10)로 내몰린다. 그러나 아모스의 예언대로 그 후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탐욕으로 무너졌다. 화려한 청사진보다 하나님 말씀이 없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은 불의가 마침내 국가의 멸망을 불렀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낱낱이 지목한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암 2:6).

이것은 사람을 노예로 사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받고 의를 파는 것을 말한다. 의라는 것은 참 지키기 힘든 것이다. 그것을 지켜나가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그것 스스로 어떤 대가를 생산하지도 못한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고비용 저효율의 골치 덩어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던져버리거나 잠깐 접어둔다. 그러면 어떤 대가가 손에 쥐어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잠깐 눈감음으로써 의를 파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매순간에 이런 갈등을 접한다.

“의인”, 의로운 방법을 고수하는 사람들, 의를 지켜나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격려하고 지켜줄 필요가 있다. 만약 모두가 의를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이 애를 쓰다가 자기 스스로 의를 팔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리저리 우리 사이에 의가 팔려나가면 결국 하나님도 팔려나가게 되고 하나님은 아무 필요도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리붙일 곳을 잃어버리시는 것이다. 의로움을 지켜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의로운 사람을 팔지 않는 길이다.

영악한 인간들은 함정을 파놓고 의인들이 어렵게 지켜온 ‘의’마저도 팔아먹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거리낌이 되어오던 것들을 제거하고 의인의 입을 틀어막지만 그것은 결코 승리의 축포를 올려야 할 일은 아니다. 결국은 모두가 망하는 길을 재촉할 뿐이다.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암 2:6).

사람을 노예로 사들이는 자들은 “안식일이 언제 지나는가? 초하루 축제가 언제 끝나는가?”를 계산한다(암 8:5). 그 때는 곡식을 가장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으며 사람을 가장 싼 값에 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이런 날들에는 종교적 축제가 열리고 희생제사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도 실컷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날이다. 그런데 고기 맛을 본 다음에 겪는 배고픔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기에 부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때가 절호의 기회이다. 얼마나 영악한 계산인가? 이 때,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아주 어처구니없이 자신의 몸값을 ‘미투리 한 켤레 값’에 흥정하기도 한다. 군 생활에서 가장 탈영사고가 많이 생기는 것이 첫 휴가를 다녀온 직후라고 한다. 이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때에는 찌꺼기 밀까지도 높은 가격에 팔아먹을 수 있기에 부자들은 손꼽아 날짜를 계산하고 있다(암 8:6).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암 2:7).

그들의 길이 굽어진 것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의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 전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를 지킨다는 것은 세상적인 힘, 세상의 지위나 경제력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 힘으로부터 자유하는 일은 가난을 수반한다. 이러한 것들이 의를 지키는 대가로 주어지는 쓴 잔이며 고통이다. 의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악과 불의와 편법과 싸우기는 쉽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것은 내적으로는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자기 손아귀에 두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스스로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미투리 한 켤레 값에 팔려가는 사람의 현실적인 상황은 그가 가졌던 거창한 의지를 비웃고 사람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흙먼지 속에 처넣고 짓밟아 버리게 한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놓고는, 그 위에 눕고”(암 2:8).

여기서 옷은 일종의 채무증서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할 성전은 이제 채무증서를 가장 안전하게 집단으로 관리하는 곳이 되었다. 고대근동의 경우 성전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내주는 은행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성전 자체가 채권자일 수도 있다. 또는 부자들이 자신의 재물을 회수하기 위해 수확기에 성소에서 머물러 지내기도 한다. 성소는 자신들이 가진 채권의 권리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고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성소는 자신들이 별도로 치안 유지를 위해 돈을 들일 필요도 없는 곳이며, 또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채권에 종교적 의무감을 더하여 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성전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부자들에게 빚 문제로 호출당해 가는 곳이 되었다. 그들 중 혹 신앙심이 돈독하여 적은 양의 제사라도 드리고 싶은 경우라도 성전에서 자리 펴고 지키는 채권자들의 눈이 무서워 엄두를 낼 수도 없다. 그래도 신앙 양심상 꼭 제사를 드려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덜미를 잡힐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이 가진 신앙심까지 이용하여 채무를 받아 내는 도구로 삼으려는 진풍경이 성전 안에서 벌어진다.

덮을 것이라고는 겉옷이 전부인 사람의 옷을 담보로 잡은 경우 그 옷을 그날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옷을 전당잡힌 사람들은 분명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옷을 전당잡아서 모든 제단 옆에 펴놓고 그 위에 누워 자는 것은 부자들이 법을 어기고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2:8).

이것은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농산물로 포도주를 빚은 것을 말한다. 고대 사회에서 농산물은 갈무리가 어려워서 술을 빚어 보관하였다. 그러니 포도주를 담글만한 여유를 가진 농민들이라면 벌금을 체납해 압수당할 리 없다. 이것은 아마 농산물을 압수한 부자들이 갈무리용으로 담근 술을 말할 것이다.

옷을 전당으로 잡거나 벌금으로 포도주를 빚은 사람들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은 전당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놓고” 잘 만큼 성전과 가까운 사람들이며,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포도주를 먹고 지낼 만큼 열심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 그들은 분명히 남보다 많은 재물을 바치는 사람일 것이다. 성전에서는 그들에게 특혜를 주고 그들은 성전에 더 많이 바치는 공생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이 가진 종교적 열심의 허울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그들이 위장하고 있는 열심의 밑바닥에는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는 욕심이 있다. 그들이 성전에서 먹고 지내는 그 속에는 자신의 소유를 견고하게 하고 빌려준 것들을 한 푼이라도 빠짐없이 받아내기 위한 속셈이 있다.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없다. 그들에게 전혀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뜩 문뜩 소리치는 양심의 소리를 틀어막고, 세속화된 자신들의 불신앙을 숨기기 위해 성전에서 먹고 자고 지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전혀 신앙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없다.

호세아의 종교비판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4:6).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혹시 다른 종교를 갖거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제사장에게 하는 말씀이다. 그는 이미 성직을 수행하고 있으나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예언자는 더 배신감을 느끼고 이스라엘 제의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호 4:6-10, 5:5-7, 5:15-6:6, 8:11-14, 10:1-2).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 그들은 내 백성이 바치는 속죄제물을 먹으면서 살고, 내 백성이 죄를 더 짓기를 바라고 있다(호 4:7-8).

제사장이 많아질수록 하나님께 짓는 죄가 많아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제사장의 사명은 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죄를 많이 지어야 속죄제물도 많이 들어오는 법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다시는 죄짓지 말라”며 사람들을 돌려보내지만 내심으로는 ‘더 지어라, 더 많이 지어라’며 그들이 죄짓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죄를 많이 지어야 그 보상 심리로 제물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가장 정직해야할 야훼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마저도 겉의 생각과 속에 품은 마음이 다르다. 오늘날의 교회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울의 특정지역에 대형교회들이 밀집해 있는 현상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고, 죄가 많은 곳에 헌금도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주님을 찾아 나선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으니…… 그들이 지키는 새달 절기가 밭과 함께 그들을 삼킬 것이다(호 5:6-7)

양 떼와 소 떼는 모두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에게 물질이 넘치고 제사도 넘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떠나셨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 알기를 더 바란다.(6:6)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8:11-13)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10:1).

제단과 돌기둥도 모두 종교적 행사에 쓰이는 것이다. 형식적인 종교는 최고의 열심을 향해 달려가지만 진실성이 없는 마음, 서로가 속이는 속임수만 난무하는 세상을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호세아 때는 제단도 많고 하나님을 찾는 예배(제사)도 많고 물질적으로도 가장 풍요로운 전성기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에게 돌아오라(히, ‘슈브’, 회개하라)고 외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맹목과 무지 그리고 신실한 사랑의 결핍은 사회 전체를 무질서로 몰아넣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라도 사람들은 서로 건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결국은 사회 전체가 부패한다. 그들은 서로 속이고, 안으로 들어가서 도둑질하고, 밖으로 나가서 떼 지어 약탈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꺼내어 흔들며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의인인 양 꾸며 보이려고 한다. 그런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꾸며낸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들의 진짜 하나님은 자신의 이기심이며 자신의 이익이다. 하나님도 자신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사야(사 1-39장)의 종교비판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사 30:1-2).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사 31:1).

여기서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또는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의 힘, 무기와 군대 숫자를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히스기야는 매우 경건한 왕이고 야훼 신앙에 충실해서 모든 산당을 철폐했고 이방신을 제거한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요시아와 더불어 가장 칭찬과 존경을 받는 왕이다. 그는 야훼신앙에 충실하고 종교적으로 매우 열심이 넘치는 왕이었다. 그가 ‘기도’ 안하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리는 만무하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반응하고, 그의 사정을 들으시는 것이 어떤 경우인가? 하나님은 ‘기도’도 들으시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의 아픔, 고통,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직접 들으신다. 우리는 성서에서 신음하는 히브리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부르며 그들의 아픔을 참을 수 없으셨던 야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지나치지 않으신다. 고아와 과부들이 부르짖거나 품삯을 못 받는 노동자들이 부르짖으면 가장 먼저 들으신다. 이스라엘에 와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 그들이 부르짖으면 듣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 일로 인하여 고통 받는 백성, 민중의 아픔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맹을 맺든 조약을 맺든 개혁을 하던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 해야 한다. 제 정권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큰 정치적 도박을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처사’이다. 왕과 백성들이 입으로는 야훼를 외치지만 그것은 입에 단 종교행위 일 뿐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백성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아무 대책 없이 무조건 하늘만 보고 기도하라는 말인가? 왕은 외국 군대의 침략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가? 이사야는 믿음과 동시에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민중을 학대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다. 이사야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심 메시지는 심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잘못 행한 것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킨다고 선언한다.

이사야는 상류층 출신이지만 강한 민중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을 심판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본 이유는 그 땅의 백성들, 농민들, 민중에 대한 정의를 지키지 않았고 그들의 인권을 억압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가 주장하는 믿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단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왕들이 하는 일이 과연 그 땅 민중에게 어떤 도움이 되며 그들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또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유다를 외세의 종합전시장으로 만드는 일이 과연 그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조치인가? 아니면 단지 정권 안보 차원에서 하는 일인가? 유다 지도층은 민중에게 닥쳐올 부담과 짐을 생각지 않고 무조건 왕실 안보만을 생각해서 이리저리 임시 방책으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그 결과 외교적 동맹이 잘 돼서 침략자를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정치적 종속과 무거운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 됐다. 만약 외교적 동맹이 실패한다면 더욱 잔인해질 피의 보복 역시 고스란히 민중이 감당한다. 지도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왕과 한통속이 되어 외친다.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사실을 예언하지 말아라! 우리를 격려하는 말이나 하여라. 가상현실을 예언하여라. 그 길에서 떠나거라. 그 길에서 벗어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야기는 우리 앞에서 제발 그쳐라”하고 말한다(사 30:10-11).

한국교회 현실도 이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정의를 외치는 참 예언자의 비판적인 말은 틀어막고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외치며, 뒤에서는 오히려 ‘장로 대통령 만들기’ ‘뉴 라이트’니, ‘한기총’이니 하는 집단의 이름으로 정권 만들기, 정권 편들기, 기득권 수호하기, 서민과 민중 죽이기에 대형교회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이미 이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이며 겉은 화려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이른 상태이다.

이사야는 이집트의 군마는 “고기덩이일 뿐이요 영(정신-공동번역)이 아니다”(31:3)라고 한다. 아무리 세상 힘이 넘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 뜻과 그분의 마음,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고깃덩어리요 고철더미에 불과하다. 우리는 손에 쥔 것들, 보이는 물질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그 속에 숨으려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정신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단지 겉치레만 화려한 껍데기일 뿐이다.

미가의 도시비판

“너희는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시온을 세우고, 죄악으로 터를 닦고서, 그 위에 예루살렘을 세웠다.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 소리를 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미 3:10-12).”

여기에 인용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는 바로 이사야 예언의 중심 메시지이다(참조 이사 8:5-10). 그러나 미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도시에 사는 너희들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시온이 영원하다고 하는가? 부재지주들의 도시, 권력으로 농민의 땅이나 빼앗고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온통 사기술로 먹고 사는 도시, 그 대표격 예루살렘이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도성이 된다는 말인가? 너희가 자랑하는 그 화려함은 바로 이 백성들의 피요 죽음의 값이다. 미가는 예루살렘! 그 자체가 죄악의 토대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외친다. 그러니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26-31)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4).” 거짓예언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야기한 문제들이 나라 운명을 이 지경까지 끌어 온 적(敵)이었다.

예레미야는 급기야 성전권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심판이 바로 성소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외친다. 그는 종교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성전이 오히려 영적 각성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는 성전이 전쟁 때에 자기들의 안위와 방어를 보장할 것이라는 신념은 대중을 기만하는 것으로 봤다. 잘못된 신념은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전통의 이름으로 암세포처럼 번져갔다.

사람들은 규정된 종교제의의 준수가 신께 드리는 기꺼운 예물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종교나 제의를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앉히고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도리들은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그들은 재빨리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비용과 종교적 제의를 수행하는 비용을 계산하여 움직인다. 이런 영악한 계산은 종교지도자들의 이해관계와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이 둘의 욕심이 합치게 되면 엉뚱한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계산적 이기심을 부추기고 확신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이미 종교도, 신도 아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어온 가장 큰 적(敵)은 성전이며,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전파하는 원흉도 성전이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성전 앞에 나아가 성전 파괴를 외친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 .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부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하고 말한다. …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며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 곧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장소에, 내가 똑같이 하겠다. … 너희도 내 앞에서 멀리 쫒아 버리겠다(렘 7:4-15).

예레미야는 이런 백성들을 위하여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 활동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7:16). 그런 청원은 백성들 자신이 종교생활의 오류와 그릇된 방향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종교 제의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가장 야만스럽고 뻔뻔한 장애물이 돼 버렸다. 사람들은 그들의 값비싼 제의들과 하나님께 드린 선물들이 하나님의 호의와 보호를 확실하게 보증하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선물들이 아니라, 정의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덫을 놓아 넘어지게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떠벌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외치신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 내가 허락할 터이니, 번제든 무슨 제사든 고기는 다 너희들이나 먹어라.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번제물이나 다른 어떤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했더냐? 바치라고 명령이라도 했더냐?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렘 7:21-23).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렘 5:1).

예레미야는 터질 듯한 심장으로 예루살렘 성전 앞에 서서 외친다. 당시 거짓 예언자, 왕들, 백성들은 모두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때 보다도 예루살렘 성전 앞은 붐비었고 제사를 드리는 행렬로 가득 찼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말하며 잘된다고 희망을 떠벌였다. 그러나 예언자는 백성의 신음과 고통을 들으며 그들이 망할 수밖에 없음을 외친다. 망할 것은 망해야 새 것이 세워진다.

에스겔의 종교비판

에스겔은 다른 예언자들이 했던 것처럼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야훼 하나님을 버린 종교적 혼탁성에 대해서 질타한다.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은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요시아 종교개혁의 역작용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나안 여신, 바벨론의 타무즈 신, 이집트의 호루스 신, 그리고 태양신들을 숭상할 정도였다. 위기 속에서 그들의 종교심은 오히려 강해졌다. 방방곡곡 제의와 기도 소리는 높지만 그것은 나약한 의지를 기댈 수 있는 단순한 종교적 본능일 뿐이었다. 역사를 섭리하시고 삶을 주관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는 무관했다. 결국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버렸고 잡신들에 의존했다. 잡신들은 자기 스스로 잡신이라고 이름표를 붙이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과 결합하여 가장 화려한 얼굴로 치장하고 있다.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불안감과 이기적인 욕심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혔다. 에스겔은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 버리고 정의도 버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선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허사이다.

에스겔은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한다. 예언자들은 음모를 꾸미며 마치 먹이를 찾는 사자처럼 으르렁댄다. 그들은 생명을 죽이며, 재산과 보화를 탈취하며, 그 안에 과부들이 많아지게 하였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위반하고 거룩한 것들을 더럽혔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한다(겔 22:26). 지도자들도 먹이를 뜯는 이리떼와 같아서,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시킨다. 그런데도 그 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주고, 속임수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하지 않은 말을 주의 말이라며 전한다(겔 22:28). 목자들은 양떼를 먹이고 양들을 위해 때로는 목숨을 내어놓고 싸워야 한다. 그런데 제 양을 돌보기는커녕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그 양털로 옷을 해 입는다. 양떼가 흩어져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도 그 양떼를 찾으려고 물어보는 목자가 없다(겔 34:3 이하).

예레미야 때와 같이 위기 상황에서 희망을 선포하던 하나냐 같은 예언자는 쉽게 잊혀졌다. 그러나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하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회의와 환멸은 점증되었다. 그들에 대한 환멸은 하나님의 실체, 권능, 정의에 대한 신뢰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그들은 참된 예언자의 말도 단지 호기심으로 ‘주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 하면서 그저 듣기만 할 뿐이다. 그 말에 복종할 의사가 아예 없다. 백성들은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랐다(겔 33:31). 백성들은 참 예언자의 말을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말씀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겔 33:32-33).

몽땅 벗어난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요란한 종교행위는 다 거짓일 뿐 실상은 하나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하나님이 떠나셨는가? 그들이 행하는 행위 속에 이미 하나님은 아무도 찾지 않는, 찾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되어있다. 이미 그들 마음속에 진실도, 정의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도 없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탐하여 속이고, 꾸미고, 치장하여 내 보이는 거짓의 전쟁터 뿐이니 그들이 말로 내세우는 하나님은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는 결국 자기 자신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너희가 자신을 더럽히며 살아온 길과 모든 행실을 기억하고, 너희가 저질렀던 그 온갖 악행 때문에 너희가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겔 20:43).

이스라엘은 그들의 악행에 너무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빠져나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24:6이하, 35:6, 36:18). 그렇기에 야훼께서는 마치 수술하듯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심으실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예레미야가 가졌던 이상이다(렘 31:3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겔 11:19).

제3이사야(사 56-66장)의 종교비판

예언자들은 삶을 떠난 제의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한 금욕주의, 제의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 선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금욕이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유대사람들은 걸핏하면 금식을 했다. ‘금식’이 가지는 본래 삶의 자리는 무엇인가? 내가 먹을 음식을 아껴서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내 욕망을 절제하여 모두가 함께 연명해 나가기 위한 삶의 자리에서 ‘금식’이라는 종교의식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그 본뜻과 자리는 상실된 채, 종교적 형식만이 살아남았다. ‘그냥 굶는 행위’ 자체가 거룩하게 되었으니, 감동 없고, 쓸데없는 형식만 남아 ‘거룩’ 자체를 타락시켜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누는 의식 없이 단지 종교의식으로만 금식하며, 오히려 그들이 금식하는 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사 58:3). 이웃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은 남보다 더 의롭다는 판단에 매달린다.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한다. 그러니 그들이 통회하고 괴로워하며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주님께서 기쁘게 반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겠느냐?(사 58:4-5)

제3이사야는 성전건축을 반대한다. 그와 동시대 예언자인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 건축에 열심이라면 제3이사야는 정반대 논리를 편다. 그는 신상들이 단지 사람들이 만든 조형물일 뿐이라고 보았던 제2이사야의 우상 숭배 비판을 발전시켜 성전에까지 그것을 확대 적용한다.